루소는 스위스에서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자식교육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는 루소가 10살 되던 해에 집을 나가버리고, 외삼촌 아래 방황속에서 성장했다. 루소의 어린시절은 방치와 슬픔 그 자체였다. 직업교육으로는 서기직을 배웠는데, 훗날 귀족출신 바랑부인의 서기직을 하며 후원을 받으면서부터 프랑스에서 자기 주장을 펼치게 된다.
1. 불우한 어린시절을 후원을 입고 일어선 루소
외삼촌이 한 목사에게 루소를 맡겼으나 그 집에서 쫓겨났다. 1724년 제네바에서 재판소 서기 밑에서 필사 견습공을 하거나 조각가 아벨 뒤코맹의 집에서 도제 일을 하게 되었다. 1728년 제네바 시의 야간 통행금지령을 어긴 것을 계기로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바랑 부인을 만나게 되어 그녀의 집사로 일하면서 후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루소는 16세였고 남작부인은 29세였는데, 부인은 정략결혼으로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부인은 책을 많이 가지고 있어 루소가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루소가 음악 교육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루소는 바랑 부인을 '엄마'라고 부르고, 부인은 그를 '꼬마'라고 불렀다. 루소는 당시 잘생긴 미소년이었고, 루소는 21세부터 26세까지 남작부인의 애인이었다. 루소는 저서 '고백'에서 ' 남작부인과 첫 관계에서 쾌락을 느꼈지만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 듯한 느낌도 받았다'고 했다. 1743년에 한 귀부인의 도움으로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채용되어 이탈리아로 가게 되는데, 루소에게 있어서 이탈리아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지속적으로 월급이 체납되면서 11개월만에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 경험을 통해 루소는 관료주의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가지게 했다.
2. 하녀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루소
1745년 루소는 여러 귀족부인과 사귀었지만, 결국 23살의 하녀(호텔 세탁원), 이 시절부터 루소는 호텔의 세탁부인 테레즈 르바쇠르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하였다. 이후 루소는 그녀와 남은 생애를 함께 했지만, 다른 여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 루소와 테레즈 르바쇠르 사이에 5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1762년 루소는 '에밀'을 발표했다. 루소는 인간을 교육하는 주체로 자연, 인간, 사물의 3가지를 들어, 사람의 능력을 내부로부터 발전시키는 것은 자연의 교육이고, 이 교육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며, 우리가 접촉하는 주위의 사물에 대한 경험을 얻는 것은 사물의 교육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교육이 서로 모순될 때에 그릇된 인간이 형성되고, 조화를 이루고 동일한 목적에 집중될 때에 사람은 비로소 완전한 교육을 받게 된다고 보았다.
'에밀'에서 그는 자연에서 배우는 아동중심 교육, 노작중심 교육, 범애파 교육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말로 "인간이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루소는 에밀을 비롯한 그의 어떤 저서에서도 그 말을 한 적이 없다.
에밀
교육론을 소설에 접목시킨 새로운 형태의 교육서이다. 주인공인 에밀은 고아지만 현명한 가정교사에 의해 자연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한다. 에밀의 성장에 따라 5부로 구성
www.aladin.co.kr
- 아이의 발달단계 맞는 교육, 12세까지 아동이 스스로 느끼고 체험하는 교육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 성교육은 솔직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며, 적령기에 빨리 결혼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 종교교육은 창조주는 있겠지만, 원죄는 없으며 계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며 자연종교를 주장했다.
- 도덕교육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며, 정서발달과 사회적 교육이 도덕교육이라고 주장한다.
- 여성교육은 수종적이며 남성을 기쁘게 하는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 시민교육은 공적교육으로서의 사회제도하의 교육이며 인간교육과 양자택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루소 명언>
- 자녀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뭐든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해주는 것이다.
- 우리는 세상에서 유능한 교사에게서보다 분별있는 대화속에서 훌륭하게 교육된다.
- 자연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우리를 속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 한 포기의 풀이 싱싱하게 자라려면 따스한 햇볕이 필요하듯이 한 인간에게도 칭찬이라는 햇살이 필요하다.
-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아버지 자격이 없다. 가난과 일로 아이 양육과 교육을 소홀히 했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루소는 자기의 5명의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냈고, 결국 찾지 못했다. 실제로 루소는 아버지를 평생 원망하면서 살았고 아이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독서가 아이의 불행의 도구로 본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당시 귀족 아이들의 교육을 보고 자연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방치와도 같은 것이며 하류층이나 장애자 교육에는 관심두지 않았고, 실제의 상태로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학교교육의 병페를 지적하고 잇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밝히지 못했다. 남녀 성차별적 내용(에밀과 소피)은 오늘날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본인도 여성편력이 있었고, 자유연애를 선호했다.
3. 좌익성향의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밑거름
스위스출신의 사상가, 소설가, 철학자, 교육학자, 작곡자인 그는 정식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762년에 저술한 '사회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 있어서 확정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사회 계약론을 전개하고 인민주권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항상 정당한’ 일반 의지를 설정하고, 실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다수결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회계약론'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전체는 4편으로 나뉘는데 이론적인 기본은 '일반의지'론과 '사회계약론'의 둘이다. '일반의지'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people)의 의지를 말한다. 루소는 사회 상태에서 그것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그는 그것을 인간의 의지 속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일반의지야말로 주권의 기초이며 법이나 정부도 여기서 나온다. 이 국민의 일반의지는 절대적이며 그르친다는 예외도 없고, 타인에게 양도나 분할도 불가하다. 따라서 주권 또한 절대적이다. 이 루소의 인간주권론은 가장 철저한 인간주권론이며, 더구나 그는 거기서 인간주권의 절대성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따라서 루소가 구상한 국가는 의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직접 민주제의 국가이다.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06 : 루소 사회계약론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시리즈 6권. 서울대 인문학부 교수진이 선정한 ‘서울대생들이 꼭 읽어야 할 인문고전’을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화로 만든 인문고전 입문서이다.
www.aladin.co.kr
국민의 일반의지에 바탕을 둔 국가를 형성하는 수속(순서 또는 절차)을 제시한 것이 '사회계약'론이다. 각 개인은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면서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하나의 약속을 하고 국가를 형성한다. 이 약속이 사회 계약이다. 그것은 주권자인 개개인 상호간의 약속이며, 지배자에 대한 국민의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권은 바로 이러한 인민 전체의 일반의지의 행사이며, 따라서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정부는 이를 집행할 따름이며, 그리하여 정부는 일반의지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급진적인 혁명사상으로 연결이 되어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4. 그의 말년은 씁쓸하다
루소에 대한 평가는 다채로운데, 평생 루소의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놓고 그를 흠모했다는 철학자 칸트에 의하면 "나는 인식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낀다. 그것만이 인류에게 명예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나를 루소가 옳은 길로 인도했다. 나는 그로부터 인민을 존경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함으로써 왜 그가 '에밀'을 읽는데 몰입해 한번도 빠지지 않은 산책을 걸러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의 특색은 18세기적인 사회 윤리를 가장 독창적으로 탐구한 점에 있으며, 근본 사상은 "자연은 인간을 선량·자유·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노예·불행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가 쓴 모든 저작도 이 원리에 기초하여 개인과 사회를 회복하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영향은 철학·정치·교육·문학 전반에 걸쳐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문학적 지위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자 볼테르와 함께 19세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계몽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장자크 루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루소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루소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 ~ 1778년 7월 2일)는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난 프랑스
ko.wikipedia.org
프로이센에서 3년간 망명생활을 하던 중에 루소는 현지 목사의 불화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그를 해하려고 하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에서는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데이비드 흄이 돌봐주었으며 생활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순조로웠던 영국 생활은 루소가 피해망상 증상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불행은 모두 음모자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고, 흄이 그 음모의 대행자이다'라고 의심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대인배인 흄은 루소의 망상이 도질때마다 감싸주었지만, 더 이상 망상을 견딜 수 없던 루소는 결국 1767년 영국을 떠나고 말았다.
영국을 떠난 루소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남은 생애를 곤궁하게 살았다. 예전에 그에게 내려졌던 체포 명령은 아직 유효했지만, 주변의 도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1768년 루소는 그동안 같이 지내오던 테레즈 라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처음에 루소는 테레즈와 결혼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재미 좀 보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지적으로는 상당히 부족하지만 자신을 지지해주는 테레즈와 오랫동안 함께하게 되었고 결국 20년 만에 정식으로 결혼한 것이다.
- 그는 경험이 배움에 앞선다고 하여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의 입장에 섰다.
- 사람들이 인간다워이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라며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 자기의 본성과 분수에 맞게 조용히 사는 것이 행복한 인간이라고 하여 행복이 멀리 않은 곳에 있다고 여겼다.
- 어른은 교육에 의해 망쳐진 아이들이다. 교육은 어른들이 이성을 가지는데 방해물이라고 해석하였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 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한 세기나
www.aladin.co.kr
1776년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를 발표하고 1777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집필하지만,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1778년 에름농빌에서 아침 식사 중 쓰러진 뒤 점심 무렵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아, 이제 더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구나."라는 말이 유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했다. 그는 사망한 이후 11년 뒤 일어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고, 1794년 그의 유해는 팡테움으로 옮겨져서 볼테르와 나란히 묻혔다. 우리는 현대적 관점에서 루소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가난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부평초같은 인생을 살면서 사회를 계몽하고자했던 루소다. 자유연애를 하고, 자식을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당시의 사회개혁을 주장하거며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 감사합니다. 천년행복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