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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이야기

[인물] 루 살로메는 니체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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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제정러시아 시대에 부유하게 태어난 루 살로메는 막내였다. 그는 최고의 문장가이자 철학자인 니체, 독일 최고의 시인 릴케, 심리학의 선구자 프로이트를 사로잡은 자유한 삶을 살다가 갔다. 그의 영혼은 결핍이었을까, 성취였을까? 위키백과와 나무위키를 참조하여 상상이 날개를 펴고 평가해본다.

 

루 살로메, 위키백과 참조

 

러시아 기독교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막내 외동딸

루 살로메는 1861년 2월 12일 상트페테부르크에서 러시아 야전군 고급장교 구스타프 살로메와 북독일 덴마크계 루이스 윌리엄 사이에서 6남매 중 외동딸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첫사랑의 상대는 당시 교회 목사였던 하인리히 길로트로, 그로부터 철학, 형이상학, 논리학, 종교사를 공부했다. 목사 길로트가 결혼을 원했지만, 이를 원치 않았던 살로메는 여성을 받아주는 대학 중 하나인 취리히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나이 17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6남매의 막내 외동딸이라면,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까? 위로 오빠가 5명인데, 이들보다 귀하게 여겼을 테니 어릴 때부터 남자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눈이 생기지 않았을까? 자기가 최고이기에 자기의 생각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니체, 위키백과 참조

 

파울 레에와 그의 친구(스승) 니체와의 3인 동거

취리히에서 공부하며 피를 토하는 등 폐에 이상이 생겨, 기후를 바꿔야 한다는 처방을 받고 1882년 1월에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젊은 철학자 파울 레에를 만나 철학과 신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했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던 레에는 그녀를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아 살로메(21세)에게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철학자 니체(37세)를 소개했다. 니체 또한 자신을 이해하고 철학에 대해 함께 논할 수 있었던 그녀를 매우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하며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살로메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철학을 논하는 사람과는 육체관계를 하지 않는다도 철칙이라도 세운 건가? 맺고 끊임이 분명하였다면, 많은 남자들이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레에도 그렇고, 니체도 마찬가지다. 아마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남자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니체가 거론될 정도였으니까.

 

살로메에게 첫눈에 반한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고 함께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아버지 정도의 나이가 든 음악가 바그너를 소개하는 등 살로메를 각별히 아꼈다. 살로메 역시 니체의 사상에 큰 관심을 보이며 니체와 사귀었다. 니체는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는데, 그녀는 니체의 청혼을 거절하고 오로지 서로 철학만을 논의하자는 의견을 낸다. 그 직후에 니체는 다시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나 거절 당하면서 동거하던 집을 나오게 된다. 니체가 되어보자. 얼마나 쓰린 가슴을 부여잡았을까? 니체가 매력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거절당한 심정은 어땠을까? 나이는 열일곱살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살로메의 제일 큰 오빠보다 많은 나이라 거절당할 만도 하다. 그러나 실연으로 인해 어쩌면 니체의 인간에 대한 생각이나 이성에 대한 사상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

‘니체 아카이브’는 니체에 대한 권위 있는 외국의 연구서를 선별해 엮은 시리즈다.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는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는 니체 철학을 소개한 최초의 니체 연구서라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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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의 결혼 이후의 자유한 생활

루살로메는 베를린에서 레에와 동거하며 여러 부류의 지성인들과 교류했다. 당시 이러한 살로메의 생활을 탐탁지 않아 하던 것은 어머니였다. 어쩌면 딸이 배움의 열정보다 정숙하지 못하여 염려한 것은 아닐까? 1887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로메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레에가 살로메에게 청혼을 했지만, 살로메는 지금처럼 친구로서의 관계까지만 유지하다가, 레에의 청혼을 거절하고 동거하던 집을 떠난다.

 

그런데 '너와 결혼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며 열렬한 구애를 하던 동양언어학자인 안드레아스와는 별 문제없이 결혼을 해버린다. 그녀는 안드레아스와 성생활이 없는 결혼 생활과 다른 남성들과 자유롭게 데이트, 외박까지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듣고 니체는 우울증에 빠지고, 레에는 절벽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안드레아스는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교수직을 잃은 후 살로메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다가 1892년부터 별거한다. 그래도 살로메는 그가 죽는 1930년까지 서류상의 결혼 관계는 유지했다고 한다.

 

 

[중고]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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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에게 두번의 청혼에 거절당한 니체

레어라는 친구는 자살을 하고, 니체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10년 동안 정신병을 얻어 허무한 삶을 살아간다. 니체가 이렇게 살게 된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루 살로메에게 실연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전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 때문이다. 목사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나 5살에 아버지를 잃고, 남동생도 잃었다. 루터교에 독실한 할머니와 고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린시절 니체에게는 자유로움이라곤 없었다. 그래도 시와 언어에 감각이 있었던 그는 본대학에 들어갔고, 고전문헌학을 했는데, 권위있는 교수의 추천으로 바젤대학교 최연수 교수로 임용이 된다. 이때 그는 아무런 학위도 없었는데, 논문심사도 없이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박사학위를 받아 한달후 교수로 채용한 것이다. 이 시기도 강의만 탁월하면 박사학위가 가능했다는 것이 놀랍니다. 역시 유럽의 실용주의구나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기존의 인식들과는 달리, 문학작품으로 분류되어야 하며, 그 중에서도 시에 해당한다. 가장 원문에 가깝게, 충실하게 번역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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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되어 음악가 바그너와 친분을 맺고 쇼펜하우어 철학에 빠지게 된다.  1870년 의무병으로 입대하였으나 병을 얻어 귀환하여 2년 후에 "비극의 탄생"을 완성하고 바그너에게 헌정한다. 그후 10년 동안 정신병을 앓으며 유럽을 누비며 저작활동에 몰두하여 수많은 작품을 냈다. 니체는 처음에 시인, 철학자 혹은 예술가, 철학자로 이해되었다. 니체 사후에 학계는 니체에 대해 침묵했으나 1940년 전후 하이데그에 의해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으로 등재된다. 이후 1960년대 프랑스에서 니체는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 살로메와의 관계에서 니체는 어땠을까? 그의 외침은 다양한데,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의지"의 철학을 주창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도덕은 허구다. 삶은 권력에 대한 의지이고, 삶의 모든 과정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는 아모르파티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초인을 소망해야 한다. 초인은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사람이고, 신이 죽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며, 영겁회구 사상을 깨달은 사람이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내려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을까요? 조그맣고 나약하고 더럽고 교활한 여자, 가짜 가슴이나 달고 다니는 구역질나는 여자! (출처: 클래식클라우드 블로그 참조)

 

 

괴테, 헤세, 릴케, 니체의 글

세계적인 화가들의 명화와 독일 대표 시인들의 시를 하나로 묶었다. 그들은 재가 되었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찬란한 생의 불꽃을, 지친 현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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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살로메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지적인 모습으로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에서 온 뮤즈라며 칭송을 받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이런 조건을 적극적으로 즐기며 평생동안 자신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실질적인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남자와 연인으로서의 감정은 생기지 않지만,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자신과 인문학적인 관심사가 일치하는 남자들을 동시에 사귀었고, 정신적인 교류를 하는 남자와는 육체적인 관계를 철저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로메는 일흔 살의 나이에 당뇨병 등으로 몸이 허약해져 병원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고, 요통과 유방암 등으로 점점 쇠약해진 그녀는 1937년 1월 5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이글을 쓰며 살로메보다 35년 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우리나라 나해석이 닮은 꼴이 아닌가 한다. 그는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유학을 하였고, 우리나라 여류 첫 화가이자 시인, 소설가로서 세계여행을 두루하였고, "여자의 정조는 취미다"는 말을 남길만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니체와 장자 두 철학자의 공통점을 니힐리즘(허무주의)이란 코드로 묶었다. 허무주의란 개인에 간섭하는 절대적 가치체계에 대항하는 자세다. 장자와 니체 또한 절대적 가치를 거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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